에루화 2009. 2. 27. 18:20

 

 

 

가난했던 시절 외동읍 먹거리 - '삘기꽃'

‘띠’는 지방에 따라서 '뺄기', '삘기', ‘삐비’, '삐삐'라고도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린잎은 ‘삘기’ 또는 ‘띠순’, 뿌리는 ‘띠뿌리’, 꽃을 배어 통통해진 줄기는 ‘삘기’, 활짝 핀 꽃은 ‘삘기 꽃’, 성장한 풀줄기 전체는 ‘띠풀’이라고 한다. 이하에서는 표준어(標準語)인 ‘띠’ 또는 ‘삘기’로 통일한다.


‘띠’는 벼목 벼과의 외떡잎식물로 높이 1m 정도로 산야(山野)에서 흔히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서 뿌리줄기는 가늘고 길며 흰색이고 가로로 뻗는다. 줄기는 곧게 서고 마디에 털이 있다. 잎은 길이 20∼50㎝, 나비 7∼12㎜로 가장자리가 거칠거칠하고 뭉쳐난다.


꽃은 5∼6월에 원추꽃차례의 이삭 모양으로 잎보다 먼저 나며 길이 6∼15㎝이다. 가지 끝이나 줄기 끝에 흰색 또는 흑자색(黑紫色) 꽃이 피고, 갈색의 수술이 달리며 갈라진 각 가지 위의 마디에 1개의 어린 이삭이 달린다. 뿌리줄기는 이뇨(利尿) 및 지혈제(止血劑)로 사용하고, 성장한 줄기와 잎은 지붕을 이는 이엉이나 도롱이(우장)를 만드는 데 쓰인다. 밭둑이나 논둑, 방천, 산과 냇가, 황무지(荒蕪地)에 떼 지어 나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부아시아 등지의 온대(溫帶)에 널리 분포한다.



삘기

 


 

 


‘청명(淸明)’ 때가 되면 ‘띠(牙)’의 어린순, 즉 ‘삘기’가 돋아나는데 군것질거리가 없던 옛적 어린이들은 다투어 이를 뽑아 먹었다. ‘삘기’는 ‘띠’의 어린 꽃 주머니에 해당한다. 고운 봄날 길가에 돋아 난 ‘띠풀’의 볼록한 줄기, 즉 ‘삘기’를 뽑아 그 속에 있는 하얀 꽃자루를 입에 넣으면 입 안 가득 흥건히 단물이 고인다.

 

별다른 군것질거리가 없던 예전 시골아이들의 훌륭한 봄날 주전부리감이었다. ‘삘기’는 그냥 바로 먹기도 하지만, 그 부드럽고 흰 자태(姿態)가 너무 고와서 놀이개 감으로 갖고 놀다가 먹기도 한다.

삘기 속살(꽃망울)

 


(속살이라기보다는 꽃망울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삘기’로 만드는 장난감으로는 '삘기 낙지'라는 것이 있었다. ‘삘기’는 또 입에 넣고 바로 삼키지 않고 한참동안 씹으면 '삘기 껌'이 된다. 단물이 다 우러나 빠지고 쫄깃쫄깃한 감촉만 남은 것이 껌 같은 질감(質感)을 준다. 지난 1940-50년대의 ‘삘기’는 가난한 농부들과 그들 자녀들의 양식(糧食) 같은 것이기도 했었다.



삘기 낙지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면 띠 뿌리를 캐먹는 아이들의 손길을 피한 뿌리들이 싹을 땅위로 내민다. 잎이 자라면서 잎 가운데에서 꽃대처럼 올라오는 줄기를 '삘기'라고 한다. 잎을 헤치고 올라오는 ‘삘기’는 마치 ‘나락’줄기가 가을철에 이삭을 뽑아 올리는 불룩한 벼의 모습과 비슷하다.



삘기꽃 만발한 언덕

 



 

이때쯤이면 마을의 개구쟁이들은 등에 어린 동생을 업고 누런 코를 훌쩍이며 언덕으로 오른다. 언덕에 올라가 배가 불룩한 ‘삘기’를 뽑아 속살을 입안에 넣으면 약간의 풋내와 함께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 가득히 퍼진다. ‘삘기’를 뽑아서 부족한 당분(糖分)도 보충하고, 허기진 배도 채우는 일은 짧은 춘삼월 해가 서산을 넘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렇게 맛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먹을 것이 없어서 점심을 굶었거나, 보리개떡 하나로 점심을 때운 아이들이 허전하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삘기’라도 뽑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등에 매달린 어린 동생에게는 기장 연한 부분을 잘라 먹이기도 했다. 그 시절 ‘삘기’는 군것질감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가난의 상징(象徵)이자 굴레였다고도 본다. 임인규의 ‘삘기’를 감상하고 넘어간다.

 

 

 

삘     기

 

임인규 

   

하얀 가난이 언덕배기에 피었다.

삘기 풀 하얀 털북숭이

오동통한 알배기

한입 몰아넣고 오물오물

고픈 배 달래면서 껌처럼 씹던

어린 시절의 유일한 군것질

가난은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풍요한 시절

그냥 하얀 풀 언덕 바라보며

뚱뚱한 배 한번 바라보고

하늘 한번 바라보고

가난의 기억을 씹는다.

채워도 먹어도 허전한 내 배 고래여!

끈질긴 껌 조각 같은 세월

 

 


 

'삘기'를 제공하는 ‘띠풀’은 ‘삘기’와 '띠뿌리'까지 제공(提供)하고 살아남은 ‘띠 잎’은 소가 뜯어 먹고, 소가 뜯어 먹고도 남은 ‘띠’는 여름에 어른들에 의해 베어진다. 다 자란 ‘띠’를 베어다가 응달에 말려서 ‘도롱이’라고 불리는 우장(雨裝)을 엮는데 쓰이기도 하고, 바구니 같은 그릇을 만들기도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띠 잎’으로 만든 바구니는 고급(高級) 그릇의 대우를 받았다.


필자들이 초등학교(初等學校)에 다닐 때는 하학길 옆에 띄엄띄엄 늘어서 있는 무덤위에 난 ‘삘기’를 매일같이 뽑아 먹기도 했다. ‘삘기’가 나는 묘(墓)는 묘를 쓴 지 최소 3년 이상 되어서 사람이 심은 뗏장과 야생(野生) 잔디가 만나야만 비로소 생긴다. 그리고 ‘삘기’를 뽑기 위해 함부로 남의 묘지(墓地)에 접근하는 일이란 겁나는 것이어서 대낮에도 혼자서는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동무가 한 명이라도 있어야 용기(勇氣)를 내서 올라갈 수 있었다. 대낮에 귀신(鬼神)이 나올 까닭은 없지만, 무덤에서 ‘삘기’를 뽑다가 제풀에 놀라 간혹 울면서 줄달음 쳐 도망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그만큼 미신과 속신(俗信)이 많았던 탓도 있었다.


두 사람 이상이라도 조심조심 다가가 한 발을 살짝 ‘밋등’에 올리고 한 발은 바닥에 두어서 죽은 사람에게 최소한의 예의(禮儀)를 차리고 세밀히 관찰하면 한 뼘도 안 되는 풀이 유난히 배불러 곧 터져 나올 성싶은 ‘삘기’가 잔디에 섞여 있었다.


쇠 젓가락의 절반 굵기도 안 되는 ‘삘기’를 여러 개 먹어봐야 얼마나 배부를까마는 허기진 배를 달랠 길 없는 그 시절 아이들에게는 간식(間食)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언젠가 고향에 가게 되면, 길가마다 흐드러지게 자생하던 그 때의 ‘삘기’를 한 주먹 가득 뽑아먹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