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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능 내

에루화 2008. 4. 2. 22:11
 
 
東九陵內(동구릉내) 顯陵(현릉) 3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2-1

 
 [紅箭門(홍살문)]

顯陵(현릉)은 조선 제 5대 文宗(문종)과
왕비 顯德王后(현덕왕후) 權氏(권씨, 1418~1441)의 능이다.

紅箭門(홍살문)부터 모든 부속시설은 하나씩만 설치되어 있고
좌우 언덕에 왕과 왕비의 封墳(봉분)을 따로 조성한
同原異岡陵(동원이강릉)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홍살문은 홍전문(화살전, 화살 살), 홍문, 신문이라 하며
인간과 귀신의 경계를 가름한다.

유래 : 노나라 공사선생의 아들이 붉은색을 무서워했는데
역질(홍역)에 걸려 역질귀신이 되었다한다.
그래서 붉은 색은 잡귀신이 못들어오게하는 색이 되었다고한다.

 
 [丁字閣(정자각)]

문종은 世宗(세종)의 맏아들로 太宗(태종) 14년(1414)에
태어나 세종 3년(1421)에 세자가 되었다.

세종 32년(1450)에 왕위에 올라 바른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여
백성의 신망이 두터웠고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문종은 재위 2년만에 39세로 경복궁 천추전에서 돌아가셨다.

현덕왕후는 花山府院君(화산부원군) 權專(권전)의 딸로
세종 19년(1437)에 세자빈이 되었으나, 문중이 즉위하기 9년 전
24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顯陵(현릉) 전체 정경]

3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문종은 20여년간의 世子(세자) 생활로
정치력은 우수했으나 평소 몸이 허약했기에 재위 2년 4개월만에
승하하셨다.

짧은 재위 기간이었지만 兵法書(병법서)인 '東國兵鑑(동국병감)'
등을 간행하고 '高麗史(고려사)'등을 편찬하는 등 서울의
都城(도성)을 비롯한 각 도의 주요 邑城(읍성)들을 改築(개축)하는
등의 치적올리셨다.

세종은 평소에 아들 문종이 병약함을 인하여 걱정이 많으셨다 한다.
그래서 승하하기 전 집현전 학사들에게 특별히 세손을 부탁하였다.
문종 역시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다시금 그 유지를 신하들에게
부탁하였다.

이에 어린 세자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癸酉靖亂(계유정란),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에 압치하고 군부를 장악함과, 단종을 내치고
자신이 왕이 된다.

세조의 簒位(찬위)로 사육신, 생육신등의 피비린내나는
사건을 초래하게 된다.

사진에서 오른쪽이 현덕왕후 릉 왼쪽이 문종의 릉이다.


 [文宗(문종)의 릉]

문종은 학자적인 기질을 두루 갖추었으며 자상하고 온순한
성격을 지녔으나, 허약한 체질 탓에 늘 고생하였다.

오랫동안 세자로 재위하다 부왕인 세종이 승하하자
효성이 남달랐던 문종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겨울
불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지내는 등 무리하게 삼년상을 치렀고
그 후유증으로 결국 삼년상을 끝낸지 3개월만인 1452년 5월 경복궁
강녕전에서 39세로 부왕의 뒤를 따르고 말았다.

문종은 왕위에 오른 후 따로 정비를 들이지 않고
단종이 생모인 세자빈 권씨를 왕비로 추존하였다.

현덕왕후와의 사이에 경혜공주와 단종을 두었고, 그 외 두 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그 중 사칙 양씨와 사이에 경숙옹주를 두었다.

 
 [碑閣(비각)]

현덕왕후 권씨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세자였던
문종의 후궁으로 뽑혀 입궐하였다.

그 후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가 잇따라 폐출되자
권씨가 세번째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세종 23년(1441) 7월 단종을
낳았으나 이틀만에 24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현덕왕후는 처음에는 서오릉에 묻힌 후 단종사건으로
폐서인이 되어 묘로 격하 10리 밖으로 나갔으며 34일간
파헤쳐져 있었다고 한다.

 
 [碑閣(비각)과 碑(비)]

생전과 사후 모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短命(단명)한
비운의 왕비 현덕왕후는 安東權氏(안동권씨) 집안인
花山府院君(화산부원군) 權專(권전)의 딸로 태어나 슬하에
단종과 경혜공주와 단종을 두었다.

세자빈 책봉 4년만에 승하해 顯德(현덕)의 諡號(시호)를 내렸고
문종 즉위 후 왕후에 追崇(추숭) 되었다.

 
 [문종과 현덕왕후의 비]

사육신 사건으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까지 쫓겨난 단종이
영월의 관청인 관풍헌에서 17세의 어린 나이에 한 맺힌 삶을 마감한 1457년
현덕왕후는 마침내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퍼부었다한다.

"네 놈이 아무 죄도 없는 어린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놈의 자식을 데려가야겠다."

세조가 경기를 일으키며 일어났는데 그 때 동궁의 변을 알리는
급보가 당도하여, 세자가 절명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였다.

20세에 목숨을 잃은 세조의 세자는 바로 의경세자로 훗날
조선 제 9대 왕이 되시는 성종의 아버지이자 인수대비로 유명한
소혜왕후 한씨의 남편으로 예의바르고 학문을 좋아해서 특히
해서체를 잘쓰셨으며 어진 세자였다한다.

평소 부왕 세조의 업보로 늘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훗날 그의 둘째 아들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덕종으로 추존되셨다.

세조는 엄청난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현덕왕후인 소릉에
사람을 보내어 능을 파헤쳐 관을 강물에 던져버리게 하고
석물들도 다 뽑아 다른 용도로(태종이 계모 신덕왕후의 정릉을 대하듯)
쓰게 하였다.

그러나 근처 살던 뜻있는 사람이 왕후의 시신이 안치된 관곽을
수습하여 잘 모셔 두었다한다.
 
 
 [정자각 안 능쪽으로 열린 문]

일설에는 스님이 바닷가 암자에서 꿈에 왕후가 현몽하여
떠내려온 관을 암자 밑에 묻고 단종복위시 중종8년에
어렵게 관을 찾아 7월 21일에 광릉으로 가던 중,
관이 움직이지 않아 동구릉에 묻히도록 결정하자 빽빽하던
소나무가 저절로 죽고 능자리가 되었고 서로 능을 볼 수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석물은 수락산에서 갖다 썼다고 함.


 [顯德王后(현덕왕후)의 릉]

시동생인 세조에 의해 사후 능멸을 당한 현덕왕후는
성종때 부터 뜻있는 신하들이 계속 복위 주청을 올려지다가
마침내 1513년 종묘 영녕전 문종의 위패가 안치된 실에 함께
위패가 모셔졌다.

그 후 숙종 25년인 1699년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가 복위되어
종묘 영녕전에 위패가 모셔짐에 따라 완전히 신원되어 능이 문종의
현릉 곁으로 옮겨졌다.

 


[사진. 글 / 草阿(초아) 박태선(안내판과 인턴넷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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