쥔장 관심 사항

심은자가 거두게 하라

에루화 2008. 4. 5. 21:28
▲ 텃밭에서 고구마를 캐다.
ⓒ 박도

수확의 기쁨

강원 산골은 봄가을이 다른 지방보다 짧다고 한다. 실제로 살아보니까 그랬다. 그런데 올 가을은 예년과 다르다. 올 여름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고 무더웠던 탓인지, 가을 내내 기온이 높았고 날씨도 매우 맑았다. 하지만 계절의 순환이야 어찌 막을 수 있으랴.

▲ 탐스러운 고구마.
ⓒ 박도
간밤 뉴스에 “내일은 강원산간지방에는 서리가 내리겠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오늘 오전에 텃밭에 남은 고구마를 마저 캤다. 이 고구마는 지난 4월 하순에 횡성장에서 순을 사다가 옮겨 심은 것으로, 올해도 뿌리를 내릴 때까지 비실비실 메말라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뿌리가 내린 이후로는 거름 한 번 주지 않아도 무성하게 잘 자랐다.

고구마 순을 모두 세 골 심어서 산촌에 갑자기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이 놈을 야금야금 캐다가 대접했고, 추석에는 차례상에까지 부침개로 올렸다. 아마도 조상님께서 매우 흡족히 흠향(歆饗, 조상의 신이 제물을 받아서 먹음)하셨을 게다. 이래저래 캐다보니 이제는 한 골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텃밭으로 가서 먼저 고구마 잎과 줄기를 모두 낫으로 벴다. 그런 뒤, 호미로 골을 헤치려 하자 그동안 가뭄으로 땅이 굳어 여간 힘들지 않아 하는 수 없이 괭이로 캤다. 땅속에서 나온 고구마 씨알이 무척 굵었다. 지난 9월에 캘 때보다 그새 부쩍 더 자랐다. 큰 놈은 두 주먹을 모은 것보다 더 굵었다. 굳은 땅을 헤집고 자란 고구마가 더 없이 사랑스러웠다.

수확의 기쁨이 쏠쏠했다. 농사꾼들은 이 기쁨 때문에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나 보다. 나의 외삼촌은 독실한 농사꾼이었다. 그분은 아침저녁이면 들에 나가 둑에서 농작물들이 자라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셨다. 아무도 없는 둑에서 혼자 그 기쁨에 탐닉하셨던 모습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는데 이제야 그 까닭을 알 것 같다.

나 홀로 기쁨을 마냥 누리면서 고구마를 캐는데 문득 성경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이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평범한 진리의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사에는 이 말씀과 역행되는 일이 더러 있다.

씨앗을 뿌리거나, 어린 순을 땅에 심지도 않고, 남이 애써 심은 작물의 열매를 거저 거둬들이는 얌체족들이 있다. 이들은 도둑이다.

▲ 거리에 나붙은 펼침막 .
ⓒ 박도


진리란, 정의란

지난날에는 충남 금산, 경북 풍기지방이 인삼 재배지로 유명하였지만, 최근에는 그 재배지가 북상하여 내가 사는 횡성 안흥 일대가 새로운 인삼재배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현재 내 집 앞도 인삼밭이다.

농사꾼이 인삼을 심으면 4~6년간 땀 흘려 가꾸는데 수확기가 되면 이를 몰래 훔쳐가는 절도범들이 기승을 부리는 모양이다. 차를 타고 오가다 보면 “인삼농민 6년간 땀의 결실을 훔쳐가지 마십시오! 인삼절도 형사처벌”이라는 펼침 막을 자주 볼 수 있다.

남의 물건을 훔친 도둑이야 다 나쁘지만, 그 가운데도 가장 치사하고 저질은, 농사꾼이 피땀 흘려 지어놓은 농산물을 훔쳐가는 절도범들이다. 농사꾼이 그 작물을 짓고자 잠을 설치면서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뙤약볕 아래서 김을 맸다. 그런데 절도범은 빈둥빈둥 놀다가 농사꾼이 애써 지은 작물을 거둬들여 놓은 것을 밤새 몰래 거둬가는 것은 아주 악질 도둑이다.

강도 일제에게 우리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길 때, 독립지사들은 뒷날을 기약하면서 남의 언 땅을 빌려 광복의 씨앗을 뿌리고, 어린 순을 심었다. 그분들은 그 일을 하고자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문전옥답도 버리고단봇짐을 싸서 낯설고 물선 언 땅으로 가 갖은 핍박과 설움을 무릅쓰고 '조국 광복'이라는 작물을 가꾸었다.

그런데 그분들은 당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는 거둬들이지도 못한 채 이국땅에서 일제가 휘두른 총칼에, 추위와 굶주림에 숨을 거뒀다. 광복이 되자 그 열매는 당신도, 당신의 후손도 거두지 못한 채 엉뚱한 이들이 가로채 갔다.

그들 가운데는 빈둥빈둥 놀던 자보다 씨앗을 뿌리는 것을, 어린 순을 심는 것을 애써 방해하던 악질이 더 많았다. 그들은 일제의 앞잡이로, 씨앗을 뿌리는 독립지사에게 행패를 부리고 생명까지 앗아갔다. 그들이 일제 밀정이요, 일본군이요, 위만군이요, 일제 헌병이요, 일제 고급간부들이었다.

언 땅에다가 목숨을 바쳐가며 조국의 광복 씨앗을 뿌리거나, 어린 순을 심은 독립지사로서는 통탄할 일이 아닌가. 더욱이 당신들은 이제 죽창도, 총칼도 들 수 없는 저세상 사람이고 보면, 그저 지하에서 땅을 치고 통곡하실 게다.

지난해 가을, 의병선양회 회원들과 함께 호남지역 의병사적지 순례를 1박 2일로 하였는데, 그때 참가한 대부분 회원들이 의병이거나 독립지사 후손 분들이었다. 고광순 의병장의 고향 전라도 창평 땅에서 깊은 밤 막걸리 잔을 앞에 놓은 뒤풀이 모임에서 이분들이 토로한 사무친 원한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임시정부 파수꾼 차리석 선생의 유복자인 차영조 씨는 담배팔이로 살아온 당신의 인생역정,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의 후손 이항증 씨는 배우기 위해 고아원에 갔던 얘기, 김태원 의병장 손자 김갑제 씨는 시민군이 된 사연, 전해산 의병장 후손 전영복 씨는 조상의 병풍과 유품 <진중일기>를 소장할 수 없었던 사연 등, 그 모든 이야기를 들으니까 여태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나라 같지가 않았다.

하기는 아직도 일제에 충성하던 자의 후손이 금배지를 달고 여의도에서 국정을 논하는 판에 '진리' '정의'를 얘기하는 게 얼마나 맥 빠지는 일인가.

▲ 전해산 의병장의 병풍(원래는 조선 팔도의 작전지도)과 <진중일기> 등 유품(순천대학교 미공개 소장본)
ⓒ 박도
그래서 일제시대 부민관에 폭탄을 던진 조문기(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의사는 우리나라가 아직도 일제로부터 독립되지 않은 '친일파 세상'이라고, 광복절 날 청와대 초청도 거부한 채, 시청 앞 광장에서 일인 시위를 하셨나 보다.

진리란, 정의란 거창한 게 아니다.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을 땅에 심은 자가 열매를 거두는 게 진리요 정의다. 텃밭의 고구마를 캐면서 아주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우쳤다. 이 땅에 진리와 정의가 살아있게 하려면 그 답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을 땅에 심은 자가 열매를 거두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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