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명태가 보고 싶었어
비오는 날의 동물원, 평일 오전의 박물관, 장사 안되는 동네 술집, 철지난 바닷가, 한적한 어느 시골길, 하루에 두번밖에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 ... 별것 없는 이런걸 좋아한다. 여행도 그렇다.
문득 아무런 이유없이 덕장 가득 널려있는 명태들이 보고싶었다. 아침 뉴스의 일기예보에서 강원도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다기에 마침 잘됐다 싶었고, 그길로 무작정 인제행 고속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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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군부대가 있는 모양이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 중 절반이 군인이었다. 원통 터미널에 도착했을때 하늘은 흐렸고, 조금씩 눈이 날리고 있었다. |
여기저기 때가 탄 벽에는 이미 끝난지 오래된 전시회 포스터가 붙어있고, 의자는 빛이 바랬고, 난로는 미지근했다. 삐걱 문이 열리면 드나드는 사람들은 다들 일면식이 있는듯 인사를 주고 받는다. 작고 허름한 시골 버스터미널의 풍경 그대로다. 매표소 안에 앉아있는 �은 여자는 꼬장꼬장한 어느 할머니와 돈을 줬네, 못받았네 하며 한바탕 목소리를 높이고 나더니 다른 손님들에게 건네는 말투도 곱지가 않다.
"저기... 황태 덕장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되나요?" "2,200원 이요."
어디인지는 가르쳐주지도 않고 그냥 지금 출발하는 버스를 타란다. |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떠보니 버스안엔 나만 남았다. 어느새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텅빈 시골 버스는 하얀 눈길위를 느릿느릿 달리고 있었다.
"아저씨, 아직 멀었어요?" "한참 더가요."
잠이 모자랐던것도 아닌데, 서울에서 인제 터미널 까지 가는 동안에도 내내 잤는데, 나는 또 졸기 시작한다. |
내가 한번에 못들었는지 버럭 소리치듯 '내려요' 하는 소리에 깨서 버스에서 내렸다. 휘익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차가운 바람에 정신이 든다. 처음 가보는 낯선 곳에 내렸을때 느껴지는 막막함. 그런 느낌을 좋아한다. |
두껍고 시퍼런 빙벽으로 덮힌 커다란 바위산이 있었다. 바로 앞의 가게이름이 '매바위 슈퍼'인걸로 보아 이 바위산의 이름은 매바위인가보다. |
여름 밤에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제법 들려올 듯한 맑은 개울도 있고, |
조금 높은곳에 올라가 내려다 보니 여기저기에 명태를 널어놓은 덕장도 보였다. |
지금 이 동네에서 살아 움직이는건 마치 나 혼자 인것처럼 느껴졌다. 오가는 사람도 없고, 귀를 기울이면 눈 내리는 소리도 들릴 만큼 사방이 고요했다. 그 고요는 이내 적막으로 바뀌었다. 사박사박 뽀득뽀득 내 발자국 소리만 들린다. |
그 적막을 깨트린건 요란하게 울리는 개 짓는 소리였다. 널려있는 명태들이 깜짝 놀라 다시 펄떡 뛰어 오를만큼 큰 소리로 짖어댄다.
"아이고, 시끄러. 니네 명태 안훔쳐간다." |
"여기? 눈 많이 와. 그런데 눈이 되게 예쁘게 와. 꼭 눈송이들이 허공에 멈춰 있는것 처럼 천천히 내리고 있어." |
하얀 눈밭위에 가득 널린 명태들을 보고 있으니 뭔가 많이 가진 사람처럼 기분이 흐뭇했다. 이게 뭐라고 이걸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을까. |
촘촘하게 엮어놓은 덕과 명태위에 수북하게 눈이 쌓여간다. |
용대리 마을은 겨울밤의 기온이 낮고, 계곡에서 불어오는 맑고 차가운 바람이 있어서 명태를 말리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명태들은 석달동안 눈과 비와 바람을 맞으며 밤에는 꽁꽁 얼고 낮에는 햇볕에 녹기를 반복한다. |
명태는 그렇게 석달동안의 밤낮이 지나고 나면 속살이 노란 황태가 된다. 옛날 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축을 잡든 생선을 잡든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먹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식재료의 부산물들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조리하는 방법 또한 발달했다. 명태 역시 버릴게 하나도 없는 생선이다. 알, 내장, 아가미로는 젓갈을 담그고, 이렇게 말린 황태의 껍질과 뼈는 시원한 국물을 내는 재료로도 쓰인다. |
이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종아리 까지 푹푹 빠지는 산길과 덕장을 걸어 다녔더니 신발속에 눈이 들어가 양말도 다 젖고 발이 시려워서 더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버스정류장 앞의 구멍가게에서 한잔에 오백원을 받고 타주는 커피한잔을 마시며 잠잘만한 곳이 있는지 물었더니 옥수골 쪽으로 가다보면 보일거라고 알려준다.
"혼자 왔어요?" "네." "207호로 가세요."
말수가 별로없는 주인 아저씨는 방값을 치르자 방열쇠만 건네고는 문을 닫는다. 양말을 빨아서 널어놓고, 침대에 누워 잠깐 쉬었다가 맨발에 젖은 신발을 신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
아직 여섯시가 채 안됐는데 식당은 문을 닫으려는 참이었다. 황태해장국, 황태찜, 황태구이, 산채비빔밥. 메뉴는 네가지가 전부였다. 황태구이를 주문했다. 몇가지 나물 반찬과 황태해장국이 같이 나왔다. |
젓가락으로 뒤적거릴때 마다 뜨겁게 달궈진 철판위에선 치익 하는 소리와 맛있는 냄새가 나는 연기가 피어 오른다. |
황태구이를 먹다가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내게 유일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유대균 선생님이었다. 경포대 국민학교 3,4,5,6 학년을 다니는 동안 내내 담임선생님이셨다. 5학년 때였던가, 한번은 점심시간에 어떤 녀석이 다른 녀석에게 매일 똑같이 멸치볶음만 싸온다고 놀리다 싸움이 일어났는데 선생님은 싸운 녀석들을 혼내고 난뒤 이런 얘기를 해주셨다.
너희들이 반찬으로 싸오는 그 멸치는 넓고 바닷속을 힘차게 헤엄쳤 다녔을것이고, 너희들은 그냥 멸치를 먹는게 아니라 생명이 가득한 바다를 먹는것이라고. 김치도 그렇다. 햇볕을 듬뿍 받은 밭에서 자라는 것들을 먹는것이니 그것은 그냥 김치가 아니라 태양과 땅을 먹는것이라고. 그렇게 우리도 바다처럼 태양처럼 크고 건강해 지는거라고. 그러니 반찬투정 하지말고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먹으라고. 이 얘기를 듣고 난 뒤로 실제로 나도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이건 그냥 말린 생선이 아니라 깨끗한 바다와 강원도의 맑은 바람이 만들어낸 건강한 음식인 것이다. 황태구이는 양념의 간도 잘 배어있고, 씹는 맛도 부드러워 아주 맛있었다. |
확실히 해가 길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저녁밥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는데도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혼자 있기에는 너무 넓은 방, 혼자 쓰기엔 너무 큰 침대, 12시에서 멈춰버린 벽시계, 네개의 채널밖에 나오지 않는 TV, ... 담배를 피우려고 창문을 열어보면 까만 밤 하늘에선 눈이 내렸다. 친구들 생각도 나고, 여자친구도 보고 싶었다. 창밖에 하얗게 쌓여 가는건 눈이 아니라 그리움이라고, 그 어느때 보다 외로웠고, 보고싶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눈도 그치고, 맑고 화창한 날씨였다. |
도시와는 사뭇 다른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했다. 바람이 불때마다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들이 흩날려 머리위로, 목덜미로 떨어진다. |
옥수골로 더 들어가자 산비탈 아래에 어제 본 것 보다 훨씬 넓은 덕장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명태들을 이곳에 모아 놓은듯 셀 수 없이 많은 양이었다. |
끝이 보이지 않는 덕장 위로 맑고 차가운 바람이 불고, 명태들은 겨울 햇살아래 그 바람을 타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
바람에 흔들리는 명태를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명태는 살아서는 바다속에 헤엄치고, 죽어서는 바람속에 헤엄치는구나. (글|사진 잠든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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