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약되겠지/유익한 건강정보

산나물 밥상

에루화 2008. 5. 14. 00:32



 




서양식 합리주의 시각으로 보기에 동양의 계절감각은 참 이상하다. 한창 맹렬하게 추운 겨울의 가운데 오는 새해를 신춘, 즉‘새 봄’이라 부르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봄이 들어선다는 절기‘입춘’역시, 봄이 오기 훨씬 전인 2월 초에 맞게 된다. 이렇게 추위 속에서 먼저 봄을 발견하는 시각은 어쩌면, 현상이 아닌 그 현상의 근원을 보고자 하는 동양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겨울 음식 속에는, 추위 속에서 봄을 발견하는 시각이 담겨 있다. 춥고 긴 겨울 동안 먹을 것이 마땅치 않은 우리 기후에선 자연히 저장식품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겨울이 되기 전이면 김장을 하고 갖가지 저장 음식을 준비하느라 옛 주부들의 손길은 바쁠 수밖에 없었다.

묵은 나물류는 특히 봄부터 다음해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식품 이다. 봄철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주부들은 제철에 흔한 푸성귀들을 부지런히 손질해서 말린다. 봄철 향기로웠던 쑥도, 여름날 한창 푸르렀던 호박도 모두 그 계절의 햇살과 바람을 담은 채 말라간다. 그리고 신선한 푸성귀를 구할 수 없는 날씨에 요긴한 부식거리가 되어준다.
 
얼마 전까지는, 제철이 아닌 산나물을 보관하는 방법은 말리는 것밖에 없었다. 냉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철에 산나물을 손질해서 급냉시켜 보관하는 방법이 많이 쓰이고 있다. 덕분에 향이며 색이 봄철 부럽지 않은 나물을 겨울에도 맛볼 수 있다. 천천히 봄을 기다
리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봄을 유지하는 것이 나은지는 사람의 선택일 듯하다.



산나물은 특히 그런 계절의 기억이 두드러지는 음식 이다. 요즘은 사철 신선한 야채며 과일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다못해 골목마다 들어선 24시간 편의점에서 오이며 애호박을 한겨울 한밤중에도 구입할 수 있는 세상이다. 산나물은 재배로 키우지 못하는(또는 키우지 않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에 아무래도 계절의 제한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제철에 부지런히 서두르지 않으면 한 해의 먹을 거리를 놓치게 되는 식재료인 것이다.

산이나 들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식물을 먹는 것은 현대 사회에 와선 서양 사람들보다 동양 사람들에게 익숙한 일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산나물을 뜯어 반찬을 해먹는 일은 거의 유전자에 새겨진 관습인 것 같다. 유럽이나 미국에 이민 간 한국 사람들이 민들레며 고사리 같은 식물들을 채취하다가 곤욕을 치렀다는 말도 흔히 들리지 않던가.

그뿐이 아니다. 식용으로 삼는 산나물의 종류에서도 한국은 단연 세계적이다. 산나물의 종류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밥상 위에 올라오는 나물의 종류만 해도 100여 종이 넘을 정도라고 한다. 먹을 입은 많은데 땅은 좁고 먹을 것이 모자라다 보니 산나물을 뜯어 연명한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을 것이다. 원인이야 어떻든 간에 그 많은 산나물을 분간하고 그에 맞는 조리법을 만들어내고 또 나물의 종류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보관을 하려면, 평소 자연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관찰을 해야 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산나물의 본 계절은 봄이다. 눈이 채 녹기도 전부터 눈 사이로 푸르게 돋는 산나물이 있고, 이후로 날씨에 따라 돋는 각종 풀과 나무의 순이며 여린 잎들이 나물거리가 된다. 그렇게 시작된 봄나물이 전성기를 맞는 것은 5월 초 정도다.

제 계절에 채취한 산나물은 예전엔 주로 손질해서 말려두었다가 두고두고 먹었다. 특히 겨울에 부족해지기 쉬운 비타민이며 무기질 같은 영양소를 보충하기 위해 묵은 나물을 요리해서 먹는다. 정월 대보름에 묵은 나물 반찬을 먹는 풍습에는 그런 지혜가 담겨 있다.

요즘엔 냉동 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철 나물들을 미리 냉동해두었다가 먹곤 한다. 그래서 겨울에도 파란 빛깔이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산나물들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건조에서 냉동으로 저장 방법이 바뀌었다 해도 제철에 미리 부지런하게 서둘러야 일 년 양식을 챙겨둘 수 있는 건 마찬가지다.





산나물, 즉 산채는 우리나라 어느 지역의 산에서든 흔히 만날 수 있는 먹을거리다. 유명한 산사나 산 아래에 가면 어디에나 갖춰진 것이 산채백반이다. 그리고 산채백반을 시키면 도시의 밥상에서 만나기 힘든 나물 반찬이 즐비하게 나와서 밥상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이런 관광지형(?) 산채백반을 접할 때마다 거의 언제나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느 지역, 어느 산을 가나 나오는 산나물의 종류가 대동소이하고, 조리법이며 맛도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업화, 관광상품화된 산나물 식당에서는 부득이하게 나물 공급을 전문적으로 하는 상인들을 통할 수밖에 없다.




분명 기후며 지역, 고도에 따라 산마다 나는 산나물이 다를 것이다. 애써 시간을 내어 멀리까지 가서 먹었는데, 그 지역 특유의 음식이 아니라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맛을 만난다면 보람이 없다고 느낄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다. 더구나 산채라고 하면서 서울의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콩나물이나 시금치 같은 나물이 올라온다면 산나물의 정의에 대해서 혼란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강원도의 오대산 근처에는 산나물로 유명한 식당들이 꽤 여러 곳 있다. 지역적으로 산나물을 특화상품으로 육성하고 있는 이 지역의 식당들에선 그래도 다른 지역들과 비교해볼 때 지역 특유의 산나물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큰 규모의 식당들도 많다.






산나물의 경우엔 규모가 커지면 식재료를 조달하고 공급하는 데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문제가 있다. 산의 크기며 깊이가 바뀌는 것이 아니니만큼 채취할 수 있는 산나물의 양 역시 제한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횡성군과 평창군에 걸쳐 있는 태기산 자락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산나물 음식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식당 두 곳의 주인들이 한결같이“식당이 너무 유명해지고 번창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소문깨나 나 있는 이 두 식당은, 벌써 몇 년째 크지 않은 규모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두 곳 중 하나인‘흔들바위’(강원 평창군 봉평면 무이리)는 동네 토박이인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데, 메뉴라곤 한 가지밖에 없다. 제철에 동네 할머니들이 산에서 뜯어 온 산나물들을 사서 직접 손질해 냉동하거나 말리는데, 비율로 봐선 냉동하는 나물이 훨씬 더 많다. 이곳 사장님은, 해동시켰을 때 나물의 색깔과 향이 제철 같기 때문에 냉동 보관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나물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겐 이름부터 이채롭다. 앨개지, 개두릅, 산마늘, 찔뚝발이, 신서방, 얼레지, 지장갈이, 곰취, 곤드레 같은 나물들이 돌아가며 상에 올라온다. 명이나물, 신선초, 불로초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산마늘은 울릉도와 오대산 정도에서 자생하는 귀한 나물인데 최근엔 재배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매년 채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여전히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또 대형 마트에 가면 일 년 내내 신선한 상태로 구입할 수 있는 참나물도 일부러 자연산을 구해 염장해서 쓴다. 양식으로 키운 수입 두릅이 맛에 있어서 제철의 국산에 별로 뒤질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후론 참두릅을 메뉴에서 뺐을 만큼 이 고장만의 귀한 나물을 손님에게 내놓는 데에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돌솥밥을 내면 밥이 너무 맛있어서 나물에 관심을 안가질까 봐 공기밥을 고집하고 있을 정도다. ‘메밀꽃 필 무렵 회관’(강원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은 곤드레 돌솥밥으로 유명한 곳이다. 강원도의 별미로 꼽히는 곤드레밥은 언젠가부터 전국구 인기 음식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서울에서도 곤드레밥을 하는 곳이 있을 정도니 오대산을 비롯한 강원도 일대에서 곤드레밥을 맛있게 하는 곳은 당연히 많이 있다.


이곳의 곤드레 돌솥밥 역시 나물을 냉동해두었다가 쓰는데, 들기름과 소금으로 살짝 간한 곤드레나물을 쌀 위에 올려 밥을 짓는 것이 특징이다. 곤드레밥은 마른 김에 싸 먹어도 맛있고, 반찬으로 같이 나오는 산나물들과 함께 비벼서 먹어도 맛있다. 주 메뉴는 산나물이 아니지만 곁들여지는 나물 반찬에까지 신경을 쓰고 있어서 어지간한 산채 백반 전문점에 뒤지지 않을 수준의 나물이 나온다.

침엽수림이 점점 우리 산의 주요 수종이 되면서 숲이 너무 짙어져 산나물의 양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건강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지켜야 할 원칙들을 지키지 않고 함부로 산나물을 과도하게 채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산나물로 생업을 잇는 이들에게 걱정거리도 늘어났다. 일 년 먹을 양을 봄철에 미리 구해놓아야 하니 손님이 너무 많이 와도 걱정이라는 이 음식점 사장님들의 말이 과장은 아니다. 예전에야 먹을 것이 없어 캐 먹은 것이 산나물일지 모르지만, 요즘 세상에선 소고기 못지않게 비싼 것이 나물이 아닌가. 제대로 된 나물을 정성껏 손질하고 보관해서 내놓자면 결코 적지 않은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겨울 속에서 미리 봄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봄을 앞서 준비하려는 마음일 것이다. 겨울은 어쩌면 다른 모든 계절을 응축한, 시간의 기억 같은 계절이다. 시간과 정성이 담긴 산나물을 맛보면서, 그 나물이 자라났을 계절의 깊고 푸른 산을 그려보면 어떨까. 새로운 한 해의 시작, 우리에게 다가올 시간들을 계획하고 그려보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