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약되겠지/言과行의 좋은글

매화 한마당

에루화 2009. 2. 25. 11:19

 

陸凱與范曄

육개여범엽~ 육개(陸凱)가 범엽(范曄)에게 보낸 시

 

折梅逢驛使 절매봉역사 매화를 꺽다가 우연히 역사를 만나서

寄與隴頭人 기여롱두인 농두에 있는 사람에게 부쳐 보내노라

江南無所有 강남무소유 강남에 있는 바가 없어서

聊贈一枝春 료증일지춘 애오라지 한가지의 봄을 부쳐 주노라

※농두는 농서이니 북쪽지방이다. 애오라지는 마음에 부족하나마 그대로라는 뜻이다.

 

 

(매화에 대하여)


매화는 다섯 장의 순결한 백색 꽃잎을 가진 아름다운 꽃이다. 그 모습이 애처롭고 은은한 향기를 지녔다. 그러나 꽃이 피면 오래도록 매달려 있지 못해 아쉬운 감이 있다.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매화 또한 덧없이 피었다가 지고 마는 것이 미인의 모습 같다고 하여 옛 시가에서는 미인에 곧잘 비유되곤 한다.


절개의 상징인 매화와 댓잎을 비녀에 새긴 것이 매화잠(梅花簪)이다. 머리에 꽂아 일부종사의 미덕을 언제나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축일에 부녀자가 머리에 매화를 장식(梅花粧)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봄소식을 뜻하는 매신(梅信)은 긴 겨울을 보내고 꽃이 피듯 시련기를 이겨낸 끝에 좋은 소식이 있음을 암시한다.


찬 서리를 이겨내는 강인한 성정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 가는 선비의 의연한 자세와 닮았다 하여 군자의 꽃으로 추앙 받는다. 외세의 억압에도 굽히지 않고 불의에 물들지 않으며 오히려 맑은 향을 주위에 퍼뜨리는 모습에서 선비의 기질을 본다.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松)와 대나무(竹), 그리고 매화(梅)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시인묵객들의 작품 소재로 즐겨 다루어 졌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매화가 문학, 미술, 건축, 공예 등 여러 분야의 소재가 되었다. 과거 수 천년 동안 매화를 소재로 한 예술 작품이 제작되었고 지금도 많은 작품을 통해 매화를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3, 아도기라조(阿道基羅條)에 처음 매화 기록이 보인다. 일연(一然)이 고구려에서 신라로 온 아도(阿道)를 찬(讚)한 이 시를 통해서 당시에 이미 매화가 일부 귀족들 간에 심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리 위에 눈이 쌓여 있고 얼음 도 풀리지 않았네

서라벌의 봄빛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어여뻐라. 봄의 화신은 재주도 많아

맨 먼저 모랑네 매화를 꽃피웠구나.


아도는 신라에 잠입해 들어와 선산의 모례(毛禮) 집에 기거하면서 포교 사업을 펼쳤다. 이 시에서 계림에 봄이 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신라국에 불교가 널리 퍼지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모례네집(毛郞宅)에 매화가 피었다는 것으로 불교가 신라에 처음 전해졌음을 뜻한다고 풀이된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중국의 문화도 함께 수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화도 일부 귀족들간에 심어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일반인에게도 전파되었을 것이다.


삼국 시대의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궁중을 중심으로 정원 문화가 꽃핀 것이 사실이다. 안압지나 반월성지, 포석정지 같은 문화유산은 당시의 정원이 얼마나 호사스럽게 꾸며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불교를 국교로까지 승화시킨 고려조에서는 사찰이나 궁중 정원, 귀족들의 정원에 매원(梅園)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이규보의 시에도 매화를 읊은 시가 여러 편 보인다.


비 개이니 풀빛은 하늘빛이 배어 푸르고

따스한 바람 타고 매화 향기 재 너머 오네.


봄비가 내리더니 하늘이 더욱 청명하여 풀빛마저 푸르고 재 너머에 매원(梅園)이 있는지 매화 향기가 봄바람을 타고 풍겨 온다고 노래했다. 이 때부터는 매화를 꽃으로 감상하기 위해 재배하기보다 과일나무로 재배하기도 했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는 매실이 중요한 과일이었다.


지금도 늙은 매화는 대부분 사찰 경내에 남아 있다. 삼국시대부터 많은 지식인들이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당(唐)으로 유학을 갔다. 주로 승려 계급이 당과 천축(天竺)을 오고갔지만 그들이 돌아올 때마다 서역의 문물도 함께 수입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재배하고 있는 자두, 앵두, 능금, 석류, 살구, 복숭아 같은 과일도 그 당시 불교와 함께 수입되었을 것으로 본다.


매화는 가장 일찍 봄을 .알리는 꽃이다. 전통적으로 동양 불교는 선불교(禪佛敎)에 속한다. 송대의 어느 비구니 스님이 끊임없는 정진과 고행의 수도생활로 마음을 단련했으나 도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은 바 있어 그 때의 환희를 적어 한편의 매화시로 남겼다.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매었으나 볼 수 없었네

짚신 발로 산정에 올라 구름까지 찾아보았지.

돌아오니 언뜻 코끝을 스치는 매화 향기

봄은 어느새 찾아와 가지에 앉아 있었네.



중국의 매화 기록으로는 《시경(詩經)》에서 처음 찾아 볼 수 있다. 소남(召南)편에 매실 따는 노래가 나온다. 결혼 적령기의 아가씨가 혼기를 놓칠까 아쉬워하는 노래이다. 이 시에서도 매화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비유되고 있다.


매실을 따고 나니 일곱 개가 남았네

나를 찾아올 님은 좋은 날에 오소서

 

매화는 충절을 상징하며 선비의 기개와 의지를 나타낸다. 역사적으로 많은 명현들이 매화로 호를 삼았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文)은 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여 단종에 대한 충성심을 설중매(雪中梅)와 절개의 상징인 대나무로 삼았다. 효종 때의 어영대장으로 북벌을 계획했던 이완(李浣) 장군도 매죽헌(梅竹軒)이란 호를 썼다.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이나 중종 때의 명필 매학 황기로(梅鶴 黃耆老), 우국열사 황현(黃玹)은 매천(梅泉)이란 호를 썼다.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청백리 염제신(廉悌臣)의 호는 매헌(梅軒)이며, 윤봉길(尹奉吉) 의사와 임란 때의 명장 이문범(李文範) 장군의 호도 매헌(梅軒)이다. 충절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었던 위인들이었다. 여류 중에도 매화를 호로 삼은 분들이 많다. 조선조의 여류 시인 매창(梅窓)이 있는가 하면 춘향전의 은퇴기 월매(月梅)는 보름달처럼 친근한 이름이다. 육개(陸凱)와 범엽(范曄)의 친교는 매화가 있어 더욱 고매한 빛을 발한다.


(앞에 소개 된 시와 관련하여)

아름다운 꽃 한 가지를 보고 벗을 생각하는 멋스러운 우정. 육개는 멀고도 먼 강남에서 매화 한 다발을 친구에게 보냈다. 우정을 담아서. 그 꽃이 가는 도중 시든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범엽이 꽃을 받을 때쯤이면 이미 여름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우정은 마른 가지처럼 단단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구는 지금도 친구를 생각할 때면 널리 인용하는 명구이다.



매화 가지를 꺾다가 마침 인편을 만났소.

한 다발 묶어 그대에게 보내오.

강남에서는 가진 것이 없어,

가지에 봄을 실어 보내오.


전통적으로 매화는 달을 상징한다. 회화에서는 차가운 겨울의 보름달을 배경으로 꿋꿋하게 선 매화를 격조 높은 소재로 친다. 수많은 명작들이 둥근 보름달과 함께 설중매(雪中梅)를 그렸다. 매화가 여인과 밤을 상징하고 신하를 뜻한다면 소나무는 낮이고 남성적이며 군왕을 상징한다. 그래서 정전의 집무실 뒤에 그린 일월도(日月圖)에는 붉은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매화가 달과 같이 배치되는데 비해 소나무는 붉은 해와 같이 그리는 것이 보통이다. 대체로 소나무와 매화는 함께 배치하지 않는다.

 

소나무와 대나무는 함께 그리지만 매화를 솔과 같은 자리에 두지 않았는데 이것은 군왕과 신하를 동격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대나무는 곧잘 매화와 함께 그리므로 절개와 충절의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조선조 중기 이후로 오면서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를 즐겨 그렸는데 여기서 보이는 소재가 바로 송죽매(松竹梅)이다. 경복궁 자경전(慶福宮 慈慶殿) 담장에는 도제(陶製)로 부조된 늙은 매화와 보름달을 표현한 월매도(月梅圖)가 있다. 붉은색으로 구워진 도제 줄기에 붉은 매화와 봉오리를 조각조각 붙여 모자이크 식으로 나타냈다. 바탕은 모래와 황토, 회를 섞어 발라서 밝고, 검붉은 가지와 황색 보름달이 어우러진 걸작을 빚어냈다.


매화는 회화에서뿐만 아니라 도자기, 장신구, 가구, 의복, 건축물 등 생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선비들의 방에는 술병이나 찻잔, 먹, 벼루, 문진, 연적, 필세, 필통, 종이통, 담배함에도 매화를 그리거나 조각해 선비의 기질을 마음으로 깊이 새겼다.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매화 그림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능의 벽화이다. 매화와 함께 대나무, 소나무를 섞어 그린 이 벽화는 당시에 이미 매화를 가꾸는 일이 상당히 성행했다는 것을 말한다.


초기 고려조에서는 승려들이나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 매화를 심고 가꾸는 원예 기술이 일반에게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꽃이 사철 피어 있다면 그 꽃이 귀한 줄을 모를 것이다. 마치 공기 속에 살고 있으면서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 같이. 우리가 꽃이 지는 것을 서러워하는 것은 다시 1년을 더 기다려야 그 꽃을 볼 수 있다는 지루함 때문이리라. 지는 꽃도 보는 마음에 따라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낙화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정원에 심는 꽃나무가 여럿 있다. 살구, 복사, 오얏, 벚나무는 화사한 꽃도 좋지만 떨어지는 꽃잎이 유난히 아름다운 나무다. 그 중에서도 매화의 낙화야말로 옛 문장가라면 한 두 편 정도의 시를 남겼을 정도로 중요한 작품 소재가 되었다. 봄날 지면을 가득 덮은 새하얀 꽃잎은 눈처럼 맑고 깨끗하다. 낙화의 순결을 범할 수 없었던 어느 스님은 공작 깃털로 꽃잎을 쓸어 좁은 길을 내었다고 하는데 하물며 속인이 어찌 꽃잎을 밟고 지날 수 있겠는가.


매실이 노랗게 익을 때쯤 내리는 비를 매우(梅雨)라 한다. 음력 6월은 강남에 장마가 시작되는 매우기(梅雨期)이다. 초여름을 매하(梅夏)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매우는 폭우로 내리기보다 부슬부슬 여러 날 계속된다. 이 때 내리는 비는 여름 과일인 매실과 살구를 살찌우는 생명의 물방울이다. 이슬비처럼 너무 적게 내려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지나친 소낙비로 내려도 안된다.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생명의 빗줄기가 되어야 한다. 매우, 참으로 합당한 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명대 이후 매화 꽃꽂이와 분재가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도 중국의 영향으로 매화를 병에 꽂아 실내에서 감상하는 일이 유행했다. 이보다 앞서 고려 시대의 청자 병에도 꽃꽂이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귀족 사회나 사찰에서 매화를 병에 꽂는 일이 널리 퍼져 있었던 거 같다. 고려 상감청자매병(象嵌靑磁梅甁)은 풍만한 어깨에 비해 입이 유난히 좁다. 이 병은 단순히 매화 한 가지를 꽂기 위해 제작된 고도의 절제된 도예작품이다.


동양 예술은 절제된 단순미를 격조 높은 것으로 친다. 좁은 주둥이에 꽂은 가지는 수분 증발을 막을 수 있어 꽃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꽃꽂이를 위해 전용 꽃병을 만들었을 정도로 매화는 선비들에게 사랑 받은 꽃이다. 명대에는 매화의 품종만 해도 20여 가지를 기술하고 있고 기본 색상인 백매(白梅)와 홍매(紅梅)를 같은 병에 함께 꽂은 그림도 보인다. 송의 전설적인 인물 화정 임포(和靖 林逋)는 황주 서호(黃州 西湖)의 고산(孤山)에 살면서 매화를 즐겼다. 그는 자작시 〈산원소매〉에서,


맑은 물에 그림자 비스듬히 드리우고

은은한 향기 따라 달빛마저 흔들리네

라고 읊었다.

 

임화정은 "매는 내 처요, 학은 내 아들(梅妻鶴子)"이라고 했다. 매화와 함께 평생을 혼자 살았던 그가 아니면 어찌 이처럼 아름다운 글귀가 나왔겠는가. 서호의 그가 숨어살았던 유적은 오가는 시인 묵객들의 순례 코스가 되고 있다. 늙은 매화 등걸이 에워싸고 있는 그의 묘 바로 아래쪽에는 아들인 학의 묘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매화의 정수만을 간추려 낸 이 칠언대구는 역사상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명시라고 입을 모은다. 후세의 시인들은 이 시구에서 한 자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임화정 이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노래와 그림을 통해 매화를 예찬했다. 지금도 소영(疎影)과 암향(暗香)이 매화의 대칭 시어로 자주 인용되곤 한다. 남송 초에는 이미 《화광매보(華光梅譜)》와 송백인(宋伯仁)의 《매화희신보(梅花喜神譜)》, 조맹겸의 《매보(梅譜)》가 편찬되었고, 원대에 이르러 오태소(吳太素)의 《송제매보(宋齊梅譜)》 같은 화보들이 속속 편찬되었다.


이러한 책들을 통해 매화 그림을 그리는 필법들이 자세히 소개되면서 매화도는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퍼져 나갔다. 조선에서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나 사군자(四君子) 속에서 매화가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특히 사군자 속의 매화가 봄을 상징하는 식물로 알려지면서 일생을 사계절로 축소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봄은 매화, 여름의 난초, 가을의 국화, 겨울의 대나무가 그것이다.


인생을 계절에 비유하면 봄은 소년기요, 여름은 청년기, 가을은 장년기이며, 겨울은 노년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인생에서 희망의 상징인 봄만 계속된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팔폭병풍 그림에 어김없이 매화가 등장하는 것은 봄날처럼 희망에 가득한 나날이 계속되라는 축원의 뜻이 담겨 있다. 매화가 긴 겨울을 이겨내고 늙은 가지에서 새싹을 틔워 화사한 꽃을 피우는 것에서 회춘, 건강, 장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듯 사람도 젊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매화는 온대성 낙엽수이다. 따라서 겨울이 긴 우리나라에서 눈 속에서 꽃을 피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눈을 뒤집어 쓴 매화 사진이 있다면 그것은 봄철 꽃이 피었을 때 눈이 쌓였고 그 장면을 사진에 담았기 때문이다. 설중매(雪中梅)니 한매(寒梅)니 하지만 사실은 중국 강남 지방에서 자라는 매화를 말한다.


위도상 남쪽에 위치한 절강성, 강소성 같은 곳은 겨울에도 상록성 난대성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지역이다. 그에 비해 우리 나라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또한 춥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화분에 매화를 심어 겨울에는 방안에 들여놓고 가꾸는 실내 원예가 발달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은 매화를 좋아하여 많은 명품을 갖고 있었는데 홍원매실(紅園梅室)이라는 매화 온실을 따로 두었을 정도였다.


대원군(大院君)도 운현궁(雲峴宮)에 매실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중국에서는 명의 이시진(李時珍)이 《본초강목(本草綱目)》을 펴내면서 약용 식물학적, 식물 분류학적으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중국의 독특한 식물학적 지식을 결집한 것이 바로 본초학(本草學)이다. 조선에서도 농학적 원예학적 지식이 일반 농가까지 확대되면서 매화를 재배하는 기술도 많이 축적되었다. "분매(盆梅)는 줄기가 비스듬히 눕고 가지런하며(橫斜瘦疏), 늙은 가지가 거친 것(老枝醜樣)을 진귀하게 여긴다. 연한 가지가 웃자란 것이 있으면 운치와 격조가 떨어진다."


매년 매화가 피는 봄이면 선비들의 탐매(探梅) 여행이 이루어졌다. 전통적인 탐매 여행은 당의 시인 맹호연(孟浩然)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장안 동쪽의 심산에 숨어살면서 산 속에 자생하는 매화나무에서 처음 꽃이 피는 나무를 발견하면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장안에서 파교를 건너 산으로 탐매를 떠났기 때문에 '파교심매(尋梅)'라는 고사가 생겼다. 중국에는 산과 들에 매화가 자생하므로 야생 매화를 찾았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사찰이나 지방의 관아 또는 명현(名賢)의 고택에서 자라는 매화를 감상했다.


매화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탐매(探梅), 심매(尋梅), 방매(訪梅)라 했고, 또 매화를 보고 즐기는 일은 관매(觀梅), 또는 완매(玩梅)라 했다. 옛 선비들은 지방 어느 산골에 희귀한 매화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 해도 그 매화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말을 타고 종자를 거느린 채 떠나거나, 어떤 때는 기생을 동반하기도 했다. 그들은 매화나무 아래서 시를 짓고 주향(酒香)과 매향(梅香)에 취했으며, 춤과 노래가 있는 풍류를 즐겼다. 단순히 한 그루의 꽃을 위해 떠난 것이 아니라 매화 속에 깃들인 그 선비 정신을 받들고 마음의 때를 씻기 위해 온 몸으로 매향을 들이켰던 것이다.


선비가 매화를 감상하는 장면이야말로 작품의 좋은 소재이다. 신잠(申潛)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는 《탐매도권(探梅圖卷)》이나 심사정의 파곡심매도(파谷尋梅圖) 등은 걸작 중의 걸작으로 손꼽는다. 심사정은 햐얗게 핀 매화나무 밑을 맹호연으로 보이는 고사(高士)가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는 매화를 지극히 좋아했다. 그가 얼마나 매화를 좋아했는지 호산 조희룡(壺山 趙熙龍)이 쓴 《호산외사(壺山外史)》에 자세히 소개돼 있어 눈길을 끈다.


"단원이 연풍 현감으로 있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단원에게 매화나무를 팔러 왔다. 그 매화가 퍽 기이하여 무척 갖고 싶었으나 돈이 없었다. 그 때 마침 단원에게 예전(禮錢) 삼천량을 갖고 작품을 받으러 온 이가 있었다. 그 돈에서 이천량을 주고 매화를 사고, 팔백으로 술을 사 동지들을 불러 매화음(梅花飮)을 베풀고, 나머지 이백으로 쌀과 땔감을 사니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았다." 고 적고 있다.


단원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필력을 가진 천재였다. 그만이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매화는 네 가지 고귀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함부로 번성하지 않아 희소가치가 있으며, 어린 나무라 할지라도 가지가 옆으로 퍼져 고태(古態)가 있다. 또 줄기는 너무 비대하지 않고 날렵하며, 한꺼번에 활짝 피지 않고 반쯤 개화한 것이 헤프지 않다.


옛 선비들은 빛깔이 짙은 홍매보다 흰빛의 백매를 더욱 격조 높은 것으로 여겼다. 그 중에서도 꽃받침이 연한 녹색인 백매를 으뜸으로 쳤다. 흰색은 빛깔의 모태요 모든 색을 포용한다. 같은 백매라 해도 꽃받침까지 흰색일 때는 나무 전체가 희게 보일 것이다. 더구나 푸른 달빛에 비춰 보이는 백매의 환상적인 빛깔은 선비의 시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달빛에 비친 매화 그림자를 두고 어찌 옛 선비들이 그냥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퇴계 이황은 매화사(梅花詞)를 남겼다.


마주한 둘의 마음이 함께 맑으니

내가 매화인지 매화가 나인지 모르겠네

서로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으니

밝은 달이 홀로 우리 곁을 떠도네

 

매화 앞에 앉아 있으면 모든 욕망이 눈 녹듯 사라진다. 부귀와 명예에 대한 욕심도 버린지 오래다. 그야말로 선비의 꼿꼿한 자세로 은거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을까. 때는 봄이라 흰 매화가 피었다. 그 꽃을 바라보고 있는 퇴계가 매화인지 매화가 퇴계인지 모를 지경이라 했다. 바로 무아지경에서 오랜 시간을 그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때 마침 보름달이 떠올라 매화 가지에 걸렸다. 숨을 죽이고 있는 시인과 바람 한 점 없는 달밤의 매화 가지. 둘 다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자긍심을 키워 왔다.


시류에 적응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무언의 대화 자리를 비껴가기라도 하듯 달은 가지 사이를 지나 흘러간다. 한 폭의 그림인 동시에 꿈속의 한 장면이다. 꽃과 사람이 마음으로 대화를 하고 있을 때는 달빛마저 피해 갈 수밖에 없다니. 삼국지의 영웅 조조(曺操)가 대군을 끌고 안휘성 함산현의 매산(梅山)을 지날 때였다. 허기와 갈증으로 지칠대로 지친 병졸들을 향해 외쳤다.


"저 산이 바로 매산이다. 조금만 더 가면 매실을 실컷 따먹을 수 있다."

며 군졸들을 독려했다. 병사들은 신맛을 상상하는 동안 입안에 침이 고여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무사히 매산을 넘었음은 물론이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모란을 화중지왕(花中之王)으로 받들며 꽃 중의 꽃으로 칭송했다. 그러나 너무 화려하다거나 지나친 호사는 선비의 기질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모란의 농염(濃艶) 보다는 매화의 냉염(冷艶)을, 모란의 이향(異香)보다는 매화의 암향(暗香)을 사랑했는지 모른다.


동파 소식(東坡 蘇軾)은,

남해의 신선이 사뿐히 땅에 내려와

달밤에 흰옷 입고 와서 문을 두드리네. 라며, 매화를 신선이라 칭송했다. 한 송이 꽃을 보고 신선이라고 노래했으니 얼마나 매화를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2세기 일본의 요시다 겐코(吉田兼好)는 그의 수필집 《도연초(徒然草)》에서 겹매보다 단엽매가 더 운치가 있다고 했다. 매화는 백매(白梅)와 담홍매(淡紅梅)가 겹꽃보다 더 좋다. 외겹 꽃이 일찍 피는 것이나 홍매의 빛깔이 아름다운 것도 다 좋다. 늦게 피는 매화는 벚꽃과 같은 때 피기 때문에 인기가 없고, 벚꽃의 화사함에 압도되어 가지에 달라붙어 있는 모양이 애처러운 생각이 든다. 가인(歌人) 사다이에(定家) 경은 "외겹꽃이 일찍 피었다가 어느새 저버리는 것이 매우 민감한 느낌을 주어서 재미있다"며 처마 밑에 두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었다.



                (단속사 매화)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지리산 아래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 최대수(最大樹)인 정당매(政堂梅)라는 늙은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곳은 유명한 단속사(斷俗寺)지 삼층석탑이 남아 있어서 탑동으로 불리는 조용한 마을이다. 단속사는 원래 이름이 금계서(錦溪寺)로 신라 효성왕(737~741년) 대의 공신 신충(信忠)이 763년에 세운 절이다. 그 후 경덕왕(742~764년) 대의 직장 이순(直長 李純)이 748년에 중창하였다. 그리고 신라 말 신행선사(神行禪師)가 본격적인 대가람으로 중흥시켰다.


정당매는 고려 말 강회백(姜淮伯)이 심었다고 전한다. 강회백(1357~1402)은 호를 통정(通亭)이라 했으며 본관은 진주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양왕 때는 세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대사헌에 올랐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정도전 등에 반대했다가 진양으로 귀양가기도 했다. 강회백은 처음 금계사에서 공부하다가 개성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친지들에게 자신이 애배(愛培)해 오던 매화나무의 관리를 부탁하고 떠났다.


후에 종2품 벼슬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한 뒤 낙향하여 매화나무에 정당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강회백 당시의 정당매는 100년 쯤 지나자 시름시름 죽어갔는데 그의 증손 강용휴(姜用休)가 곁에 어린 나무를 심고 그 뿌리를 정당매에 접붙여 살려냈다고 한다. 현재 지름 30~40㎝의 큰 줄기 세 개가 같은 그루터기에서 솟아올라 있으나 위쪽은 모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루터기에서 어린 가지가 여럿 돌려나 있고, 매년 봄철이면 횐 꽃이 화사하게 핀다. 아래쪽 줄기의 둘레는 2m 정도나 된다.


정당매 옆에는 정당매각이 있고, 그 안에 유래를 적은 비석이 있다. 경상남도 지정 보호수이다. 나무를 살려낸 강용휴는 후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친하게 지냈는데 김일손은 .《두류록(頭流錄)》에서 정당매를 이렇게 읊었다.


옛 산이 그리워 우연히 찾아왔더니

맑은 향기 가득한 매화 한 그루일세

物性 또한 옛 주인을 알아보는지

은근히 나를 향해 눈 속에 피어있네.



또 남명(南冥) 조식(趙植) 선생은 단속사의 정당매를 보고 이렇게 읊었다.


낡은 절의 중 야위었고, 산도 전 같지 않네

전왕(前王)이 이로부터 다시는 찾지 않으니

신(化工)도 매화 가꾸는 일을 잊어버렸나

어제도 꽃이더니 오늘 또 다시 피었네



조선 전기의 탁영이나 중기의 남명 같은 학자들이 모두 정당매를 찾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명산 절경을 찾고 명현들의 유적을 참배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정당매 같은 유서 깊은 나무라면 개화기에 많은 학자들에게 탐매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의 매화 명목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옛날에는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라면 향리에서 책을 읽는 틈틈이 갖가지 진귀한 화초를 가꾸며 한적한 삶을 누리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산업사회가 되면서 옛 선비문화가 사라지게 되었고, 명현들이 애배했던 매화 명목도 차츰 시들어갔다. 남부지방에 늙은 매화나무가 살아있는 것은 원래 매화가 중국의 강남지방 따뜻한 고장에서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경남 산청지방에는 정당매 말고도 또 한 그루의 고매가 지금도 살아 있다. 지리산 찬황봉(天皇峰) 아래 산청군(山淸郡) 시천면(矢川面) 사리(絲里)의 산천재(山川齋)는 호남의 거유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지은 정사(精舍)이다. 남명 선생은 영남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룰 만큼 호남학파의 수장(首長)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추서된 위인이다.


그가 61세 되던 신유년(1561)에 지은 산천재 뜰에는 당시에 손수 심었다는 고매 한 그루가 지금도 맑은 향을 주위에 퍼뜨린다. 산천재 건립 당시에 심었다면 440여 년이나 되는 셈이다. 이 고매는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꽃이며 향기가 지극히 맑다. 밑에서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진 줄기는 뒤틀려서 뻗어 올랐고 군데군데 벌레가 쓸어 구멍이 나 있지만 건강한 편이다. 가지도 섬세하게 자라 해마다 많은 꽃이 다투어 피는데 개화기는 3월 말이다. 남명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운(韻)에 따라 지은 매화시 속에는 매화와 더불어 욕심 없이 사는 선비의 고매한 인품이 그대로 녹아있다.


달빛 아래 누워 시 읊조리니 절로 흥이 이네

뜰 앞에 선 저 매화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으면

한 가지 꺾어 멀리 떠난 임에게 보내련만



절세의 명기 황진이(黃眞伊)도 꺾지 못한 화담, 그리고 남명은 매화만큼이나 청아한 삶을 살다간 겨레의 스승이었다. 400년이 지난 오늘날 역사의 주인공은 사라졌지만 매화는 살아서 그 무대를 증언하고 있다. 열매인 매실은 귀한 약재로 쓰인다.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나 명의 이시진(李時珍)이 쓴 《본초강목(本草綱目)》에도 매실의 약효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해 놓았다. "덜 익은 매실의 딱딱한 씨를 빼고 불에 그을린 것을 오매(烏梅)라 하고, 소금에 절인 것을 백매(白梅)라 하는데 설사, 해열, 기침, 가래, 구토에 쓴다"고 했다. 의성 허준(醫聖 許浚)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오매는 염증을 치료하고 토하는 것을 멈추게 하며 갈증과 이질, 열을 내려 주고 곽란, 소갈증을 다스린다"고 했다.


매실이나 살구 복숭아 같은 과실의 미숙과는 강한 독성을 갖고 있다. 덜 익은 살구, 복숭아를 먹으면 설사가 나고 배앓이를 하는 것도 이 독성 때문이다. 매실의 독성은 시토스테롤(Sitosterol), 레아놀 산(Oreanolic acid) 등이 주성분이다. 그러나 독성도 완전히 익으면 당분으로 바뀌어 향기로운 과일이 된다. 매실은 술을 담가 마시거나 잼, 시럽, 주스 등으로 가공해 먹기도 한다. 미숙과를 간장이나 된장에 절이면 장아찌가 되고, 독에 저장하여 식초를 낸 것을 매장(梅漿)이라 하여 조미료로 썼다.


일본에서는 소금에 절일 때 차즈기 잎을 함께 넣는다. 이렇게 하면 차즈기의 붉은 색소가 물들어 우메보시(梅干)라는 매실 장아찌가 된다. 매실의 씨를 빼고 꿀에 졸이면 매실정과가 된다. 쫄깃거리면서 새콤하고도 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매실을 과일로 먹기보다 요리의 재료가 된 것은 이미 기원전부터이다.


《예기(禮記)》에는 음식에 곁들이는 여섯 가지 음료 중에 매실로 담근 식초인 의를 마신다고 했다. 또 복숭아나 매실 절인 것을 먹을 때는 소금에 찍어 먹는다고 했다. 이미 기원전부터 매실이 요리의 재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猷+噫 매화의 꽃봉오리를 모아 말렸다가 뜨거운 물에 우려내면 매화차(梅花茶)가 된다. 매향을 혀끝으로 맛보기 위해서이다. 또 매화를 베주머니에 싸서 술항아리에 넣었다가 꺼내고 마시는 술을 매화주(梅花酒)라 했다. 동남아를 비롯한 열대 아시아 사람들은 여행 중에 매실 말린 것을 갖고 다니며 씹는다. 더위를 막아 주고 물갈이에서 오는 배탈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늙은 매화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예스러워 더욱 멋이 있다. 고매(古梅)를 많이 가꾸고 있는 곳은 전남 순천의 선암사 경내이다. 3월말이면 200년 이상 된 늙은 매실나무 수십 그루가 봄의 향연을 펼친다. 그루터기에 푸른 이끼가 자라고 줄기에는 지의류가 붙어 태고의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 열매를 거두기 위해 매실나무 과수 단지를 이룬 곳이 바로 경남 하동 지방이다. 지리산 자락에 펼쳐진 계단식 매실나무 밭은 봄이면 매화가 만발하여 구름처럼 산허리를 감싼다. 매화의 계절에 매화 탐사 여행을 계획해 보는 것은 좋을 성 싶다.


 (선암사 매화)

 (산천재 남명매)

 

 

(산청 남사마을 고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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