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 관련 정보

개성인삼

에루화 2008. 4. 8. 19:20
개성 삼농인들의 인삼자랑
   

개성지방 삼업자들은 오랜세월 지니고 있던 기업정신으로 인삼의 인공재배에 있어 유달리 독특한 기술을 창의적으로 연구하였다. 인삼은 수익성이 뛰어난 작물이라 인삼의 영농적인 재배열기로 고조되었다
고려 중엽 이후 인삼의 고귀성이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기 시작함으로써 개성은 인삼의 집산지로 형성되고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히 진행되어 국제적인 시장성은 날로 높아가게 되었다. 또한 개성의 삼업인들은 인삼을 우량품질로 개선하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인삼의 상권을 장악하여 독점하게 되어 소득 또한 증대하게 되었고 지방에서 보부상으로 성공하면 귀향하여 삼업에 투자하여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개성은 한층 발전된 부자도시로 커나가면서 지역적 민족자본의 형성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개성지방만의 특유한 삼농인 모임이 있었는데 이는 현재의 개성인삼농협의 전신인 1910년의 개성삼업조합의 발족으로 보다 많은 삼농인을 포섭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갹출된 기금 또한 관영의 여타조합에 견줄만한 것이었으니 삼농인의 상부상조뿐만 아니라 사회사업이라는 미명하에 일제의 매서운 눈을 속여 민족사상을 고양하고 민족문화 향상을 암암리에 전파하였다.

삼농인들의 정성속에 고이 자란 본포의 원삼은 전매청에 수납삼으로 정부에 제공하고 일부 삼농인들은 자가에서 쓸 것을 제외하고는 전량을 개성삼업조합의 공동제조창으로 운반하여 제품이 된 후에는 시중에서 혹은 약령시를 중심으로 한 대구지방 또는 통신판매 등으로 전국에서 소비하였다.
이와 같이 자유로이 백삼제조를 이행하다가 제업의 일원화와 가격조절로 삼농인들의 이윤 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개성삼업 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별개기관을 둠으로써 경비의 과다지출로 수익이 적다는 실리적인 점을 감안하여 다시 백삼을 개성삼업조합으로 하여금 일괄하여 공동으로 제조하고 그것을 판매하는 업무를 담당하여 6.25전쟁시까지 계속되었다.

6.25 전란 후 피난민으로서 개성삼업인들은 재력도 없었거니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인삼경작에 대한 집념만으로 의욕을 충족시킬 수 없음은 너무나도 명백한 당시의 상황이었고 이에 남하한 삼농인들은 안타까울수 밖에 없었다. 금산, 풍기 등지에서 재배 산출되는 인삼은 국내약용재로는 그 수급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과거 천여년을 지켜온 민족자본의 재원이며 우리나라의 특수토산물로 세계만방에 성가 높은 고려인삼이 6.25전쟁으로 더 이상 자랄 수 없음은 과연 슬픈 일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재산을 포기하고 남하한 삼농인들은 일구월심에 잊지 못하여 고향땅의 삼딸(삼씨)이 걱정되었다.

대대손손 이어 내려온 가업이 끊기게 될 위기에 놓이자 개성 전래의 삼농인 후세들은 적의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으로 들어가 천여년을 이어온 인삼의 재배를 계승하기 위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여 해병대의 원호아래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파헤치고 개갑하기 위하여 동이에 넣어 땅 속에 묻었던 삼동자를 파내왔다. 정녕 이러한 거사가 한낱 금전을 탐한 소치라고만 할 수 있을까. 모름지기 민족자본을 수호한다는 민족의식과 국가재원의 형성에 공헌한다는 뚜렷한 민족성을 가졌기 때문이라 하겠다. 설혹 개성이 북한에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수복할 때까지만이라도 찾아온 삼동을 수호해야 한다는 뜻에서 1951년 남한땅에 민영삼포를 설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래로 각 지방에서도 인삼의 인공재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휴전협정과 아울러 북상하여 온 개성의 삼농인들은 포천, 연천, 강화, 김포, 파주, 고양, 양주, 용인, 이천, 광주, 안성, 시흥 등 경기도내 일대에 인삼재배의 세를 확장하여 오늘과 같은 인삼사업 진흥시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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